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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ESTJ

약속 시간보다 이십 분 먼저 회의실에 도착해 보니, 이미 자료가 책상 위에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습니다. 제가 함께 일했던 ESTJ 선배의 자리였습니다. 저는 늦지도 않았는데 괜히 늦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지요.

솔직히 저는 처음에 ESTJ를 그냥 "원칙주의자"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명과 직접 일을 함께해 보니, 그 안에 꽤 다른 결이 있더라고요. 이들과 오래 부딪히고 나서야, 딱딱한 겉모습 뒤에 있는 진짜 모습을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재미있게도 ESTJ는 MBTI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기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사람들이라 그렇겠지요. 그래서 이 글은 ESTJ 본인보다, 그 곁에서 함께 지내는 분들께 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 부지런함이 '기본값'인 사람

처음엔 그 선배를 보며 그냥 부지런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을 할수록 그게 '노력'이 아니라 그냥 '기본값'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일이 어긋나면 결국 사람들이 고생한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미리 정리하고 정돈해 두는 것이 이들에게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습관이었습니다.

흔히 일중독이라고 하면 일에 쫓기는 사람을 떠올리기 쉬운데, 제 경험상 ESTJ는 좀 다릅니다. 이들은 일이 즐거워서 많이 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계획대로 착착 진행될 때 가장 안심하고, 그 결과를 함께한 사람들과 나눌 때 뿌듯해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습니다. 반대로 일정이 틀어지거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눈에 띄게 예민해졌습니다. 일이 많아서 힘든 게 아니라, 일이 흐트러지는 걸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었던 셈입니다.

모임 하나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 무엇을 맡을지, 언제까지 무엇을 끝내야 할지를 먼저 정리해서 나눠 주는 사람은 언제나 ESTJ였습니다. 억지로 나선 게 아니라, 안 하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굳이 원하지 않아도 어느새 앞에 서 있곤 합니다.

함께 있으면 든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그 든든함이 때로는 곁에 있는 사람을 숨차게 만들기도 합니다.

 

2. "왜 이렇게밖에 못 했어"가 남기는 것

ESTJ가 앞에 서면 일은 확실히 잘 굴러갑니다. 제때 의견을 주고, 역할을 정확히 나누고, 진행 상황을 꼼꼼히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예상 밖이었던 건, 이 촘촘한 관리가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꽤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왜 이렇게밖에 못 했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는 걸, 저는 여러 번 곁에서 봤습니다.

ESTJ에게 그 말은 더 잘하자는 뜻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그동안 애쓴 시간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말로 들립니다. 결과만 보고 과정은 보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은 마음을 닫게 되지요. 그 뒤로는 실수를 숨기거나, 시키는 일만 조용히 하게 됩니다. 일을 잘 굴러가게 하려던 말이, 오히려 사람들의 의욕을 꺾어 버리는 셈입니다.

새로운 방식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모습도 종종 마주쳤습니다. 늘 해 오던 방식이 잘 통했으니, 굳이 바꿀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ESTJ에게 다른 방법을 제안할 때는 "이렇게 하면 시간이 얼마나 줄어든다"처럼 결과로 보여 주는 편이 훨씬 잘 통했습니다.

만약 ESTJ 본인이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같은 이야기라도 "고생했어, 다음엔 이렇게 해 보자"로 바꿔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이 한마디가 "왜 이렇게밖에 못 했어"보다 사람을 훨씬 더 움직입니다. 결과를 챙기는 만큼 과정에서 애쓴 마음을 한 번씩 말로 알아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곁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3. 건조한 말 뒤에서 조용히 챙기는 마음

ESTJ를 '꼰대'나 '일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단정하는 시선도 있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딱딱해 보이던 그 선배가, 자기가 맡은 후배가 어려움에 처하자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위로의 말은 짧았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연락을 넣고 일정을 조정해 주는 손은 누구보다 빨랐습니다.

말은 건조해도 뒤에서 조용히 필요한 걸 챙겨 두는 방식이라, 시간이 지나야 그 마음의 크기를 알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원칙과 절차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그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나름의 방식이 있는 것이지요. 이 사람들에게 규칙은 사람을 옭아매는 끈이 아니라, 모두가 덜 다치도록 쳐 두는 울타리에 가까웠습니다. 그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은 끝까지 책임지려 하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그래서 ESTJ와 잘 지내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약속과 맡은 일을 분명하게 지키는 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묵묵히 챙겨 준 것을 알아차렸을 때 "덕분에 살았어요" 하고 한마디 건네 보세요. 칭찬에 서툰 사람일수록 그 말을 오래 기억합니다. 정해진 방식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여유, 규칙보다 사람을 먼저 헤아리는 순간이 ESTJ 쪽에서도 조금씩 늘어난다면, 서로의 신뢰는 훨씬 단단해질 겁니다.

물론 ESTJ라고 모두 같은 모습은 아니고, 네 글자로 한 사람을 다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단단한 원칙 뒤에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알면, 같은 잔소리도 조금은 다르게 들립니다. 여러분 곁에도 깐깐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든든했던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이 조용히 챙겨 주었던 일이 있다면 댓글로 나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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