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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건은 그냥 제가 다 잘못한 것 같아요. 저는 이 일에 안 맞는 사람인가 봐요."

해외영업을 하던 시절, 이 말을 한 사람은 우리 팀에서 가장 냉정하고 침착한 팀장님이었습니다. 숫자로 말하고, 일정으로 밀어붙이고, 감정 섞인 보고를 가장 싫어하던 분이었습니다. 평소의 그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습니다. 오늘은 그날의 장면으로 MBTI에서 말하는 '스트레스 상황의 역기능'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MBTI 스트레스 역기능

대형 클레임이 터진 3주

유럽의 큰 바이어에게 보낸 제품에서 품질 문제가 나왔습니다. 금액도 컸고, 다음 시즌 주문까지 걸려 있었습니다. 처음 일주일 동안 팀장님은 평소보다 더 팀장님다웠습니다. 원인 분석표를 만들고, 공장과 하루 세 번씩 회의를 잡고, 바이어에게 보낼 대응 일정을 시간 단위로 짰습니다.

그런데 둘째 주부터 그 모습이 지나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보고를 몇 번씩 다시 시켰고, 사소한 오타에도 날카롭게 반응했습니다. 팀원들은 "팀장님이 원래 저러셨나" 하며 눈치를 봤습니다.

그리고 셋째 주, 바이어가 계약 재검토를 통보한 날 저녁에 그 말이 나왔습니다. 혼자 사무실에 남아 있던 팀장님은 갑자기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고, 아무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서운함을 쏟아 냈습니다. 논리와 일정의 사람이 감정에 휩쓸린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약한 기능이 튀어나오는 순간

MBTI에서는 사람마다 가장 익숙하게 쓰는 주기능이 있고, 그 반대편에 가장 덜 쓰는 열등기능이 있다고 봅니다. 평소에는 주기능이 앞에서 일을 처리하고, 열등기능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스트레스가 쌓여 주기능만으로 버틸 수 없게 되면, 평소에 잘 쓰지 않던 열등기능이 갑자기 앞으로 나옵니다.

문제는 이 열등기능이 오랫동안 연습되지 않은 기능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반대 성향이 성숙한 모습으로 나오지 않고, 서툴고 과장된 모습으로 튀어나옵니다. MBTI 연구자 나오미 퀭크(Naomi Quenk)는 이 상태를 열등기능에 '사로잡힌(in the grip)' 상태라고 불렀습니다.

그 팀장님은 외향적 사고(Te)가 주기능인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 반대편의 열등기능은 내향적 감정(Fi)입니다. 평소의 Fi는 자기 가치와 감정을 조용히 살피는 기능이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채 튀어나오면 "아무도 나를 몰라준다", "나는 쓸모없다" 같은 과한 자기 비난과 서운함으로 나타납니다.

 

스트레스는 보통 세 단계로 옵니다

  1. 주기능이 과해진다 처음에는 원래 잘하던 방식을 더 세게 씁니다. 팀장님이 분석표와 회의를 늘린 첫째 주가 이 단계입니다.
  2. 주기능이 지나쳐 경직된다 같은 방식을 반복하며 날카로워지고 융통성이 사라집니다. 보고를 몇 번씩 다시 시킨 둘째 주입니다.
  3. 열등기능이 터져 나온다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평소와 정반대의 서툰 모습이 나옵니다. 셋째 주 저녁의 그 장면입니다.

주변 사람이 "저 사람이 갑자기 왜 저래?"라고 느끼는 건 대개 세 번째 단계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전에 두 단계의 신호가 이미 있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유형별로 튀어나오는 반대 성향

주기능에 따라 스트레스 상황에서 나오는 모습도 달라집니다. 제가 함께 일하며 본 모습들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유형 평소 주기능 스트레스 때 튀어나오는 모습
ESTJ, ENTJ Te 일을 체계적으로 밀어붙임 과한 서운함, 자기 비난, 감정 폭발
ISFP, INFP Fi 자기 가치를 조용히 지킴 날카로운 비판, 무리한 통제, 숫자 집착
ISTP, INTP Ti 혼자 논리를 따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작은 말에도 크게 상처받음
ESFJ, ENFJ Fe 사람들의 마음을 챙김 차갑고 비판적인 말, 남의 논리 허점 파고들기
ESTP, ESFP Se 지금 이 순간에 집중 근거 없는 불길한 예감, 최악의 미래 상상
INTJ, INFJ Ni 먼 그림을 내다봄 폭식·과소비 같은 감각적 몰두, 사소한 것에 집착
ISTJ, ISFJ Si 익숙한 방식과 경험을 지킴 온갖 나쁜 가능성을 떠올리며 불안이 꼬리를 묾
ENTP, ENFP Ne 새 가능성을 펼침 몸 상태나 사소한 실수에 대한 걱정, 같은 생각의 반복

표의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다만 '평소와 정반대인데, 성숙하지 않은 모습'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평소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날 저는 팀장님에게 해결책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평소의 팀장님이라면 대안을 가져오는 사람을 가장 반겼겠지만, 그 순간의 팀장님은 평소의 그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3주 동안 정말 애쓰셨잖아요"라고만 말하고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팀장님은 다시 분석표를 들고 출근했습니다.

열등기능에 사로잡힌 사람을 도울 때 제가 기억하는 원칙은 세 가지입니다.

  • 그 말을 그대로 믿지 않기 "나는 이 일에 안 맞아" 같은 말은 스트레스가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을 근거로 판단하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 주기능으로 돌아갈 틈을 주기 잠을 자게 하거나, 혼자 있게 하거나, 잠시 다른 일을 하게 해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시간을 줍니다.
  • 회복된 뒤에 이야기하기 그때 왜 그랬는지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뒤에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본인도 자기 신호를 더 잘 알게 됩니다.
스트레스 속에서 튀어나온 반대 성향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 순간을 이해해 주면, 그 사람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옵니다.

여러분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어떤 모습이 나오나요? 평소의 나와 가장 다른 모습이 무엇인지 댓글로 나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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