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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번에 소개받을 사람이 ESTJ래요. 저는 INFP라서 ESTJ랑은 최악이라던데, 그냥 안 만나는 게 낫겠죠?"
MBTI 강의가 끝나고 한 수강생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직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인데, 네 글자만 듣고 마음속으로 이미 문을 닫아 둔 상태였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자주 듣습니다. "저 유형은 말이 안 통해요." "저 유형하고 일하면 피곤해요." "우리 팀에 그 유형은 안 뽑았으면 좋겠어요."
MBTI를 공부하고 가르쳐 온 사람으로서, 이런 풍토가 조금 안타깝습니다. MBTI는 원래 나와 다른 사람을 피하려고 만든 도구가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만든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MBTI가 처음 만들어진 이유
MBTI를 만든 이자벨 마이어스는 자신의 책 제목을 '다름의 선물(Gifts Differing)'이라고 붙였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선호가 다르고, 그 다름은 고쳐야 할 결점이 아니라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이어스가 이 도구를 만든 바탕에는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 때문에 오해하고 다투는 일을 줄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이 유형은 나랑 안 맞으니 만나지 말자"는 사용법은, 다리를 놓으라고 준 재료로 벽을 쌓는 것과 비슷합니다.
해외영업 13년, 바이어를 고를 수는 없었습니다
해외영업을 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거래처 담당자는 내가 고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숫자 하나하나를 표로 따지는 바이어도 있었고, 식사 자리에서 가족 이야기부터 꺼내는 바이어도 있었습니다. 마감 한 달 전에 모든 걸 확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적 직전까지 사양을 바꾸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와 스타일이 다른 바이어를 만나면 솔직히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MBTI를 공부한 뒤로는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이 사람은 왜 이럴까?"에서 "이 사람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까?"로요. 숫자를 따지는 바이어에게는 근거 자료를 먼저 보냈고, 관계를 중시하는 바이어와는 본론 전에 안부를 충분히 나눴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래 거래가 이어진 곳 중에는 처음에 가장 안 맞는다고 느꼈던 바이어도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동료를, 가족을, 이웃을 고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를 수 없는 관계일수록 MBTI는 '거르는 도구'가 아니라 '맞춰 가는 도구'로 쓸 때 힘을 발휘합니다.
끊는 MBTI와 잇는 MBTI
같은 네 글자를 알고 있어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관계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 끊는 MBTI | 잇는 MBTI | |
| 상대를 처음 볼 때 | "ESTJ래. 나랑 최악이야." | "ESTJ래. 계획과 약속을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
| 갈등이 생겼을 때 | "역시 저 유형은 원래 저래." |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상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르구나." |
| 유형을 쓰는 대상 | 상대를 판단하고 거르기 | 나를 돌아보고 상대에게 다가갈 방법 찾기 |
| 남는 것 | 점점 좁아지는 인간관계 | 다른 사람과 지내는 방법이 하나씩 늘어남 |
'궁합표'나 '최악의 조합' 같은 콘텐츠는 재미로 보기에는 괜찮습니다. 다만 그걸 근거로 아직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미리 지워 버린다면, MBTI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스스로 버리는 셈입니다.
네 글자로 사람을 거를 수 없는 이유
- MBTI는 선호를 말할 뿐, 능력이나 인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T라고 차가운 사람이 아니고, F라고 일을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형은 그 사람이 편하게 느끼는 방식을 보여 줄 뿐,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 같은 유형 안에서도 사람은 다양합니다 Form Q로 해석해 보면 같은 ESTJ라도 세부 척도 20개의 조합이 저마다 달랐습니다. 네 글자만으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 사람은 자라고 변합니다 지난 글들에서 이야기했듯 부기능과 3차 기능은 나이와 경험에 따라 성숙합니다. 오늘 만난 그 사람은 5년 전의 그 유형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그 결과가 정말 그 사람의 유형인지도 모릅니다 인터넷 간이 검사나 지친 상태에서 받은 결과일 수 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네 글자로 관계를 끊는 건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MBTI를 공식적으로 다루는 쪽에서도 검사 결과를 사람을 뽑거나 거르는 기준으로 쓰지 말라고 안내합니다. 유형은 남이 나를 판정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이해하고 남과 함께 지내는 데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유형이랑은 안 맞아"라는 말은 사실 "저 유형과 지내는 방법을 아직 모르겠어"라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나와 다른 유형과 잘 지내는 네 가지 방법
- 나부터 보기 상대의 유형보다 내 유형을 먼저 들여다봅니다. "나는 왜 저 사람의 이런 행동이 불편할까?"를 물으면,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보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다름을 번역하기 상대의 행동을 내 언어로 다시 옮겨 봅니다. 꼬치꼬치 따지는 T는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제대로 하고 싶은 사람'일 수 있고, 계획을 자꾸 바꾸는 P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선택지를 열어 두고 싶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 상대의 언어로 말하기 S에게는 구체적인 예와 순서로, N에게는 큰 그림과 의미로, T에게는 근거로, F에게는 마음을 먼저 알아주는 말로 다가가 봅니다. 내 말을 바꾸는 게 지는 게 아니라, 전달이 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 다른 점을 역할로 나누기 나와 다른 유형은 내가 놓치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세부를 챙기는 사람과 방향을 보는 사람, 마감을 지키는 사람과 변화를 감지하는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일이 더 단단해지는 것을 해외 프로젝트에서 여러 번 봤습니다.
그 수강생은 결국 만났을까
그날 수강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ESTJ라서 안 맞는 게 아니라, ESTJ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모르니까 불안한 걸 거예요. 약속 시간을 잘 지키고, 다음 만남 계획을 분명하게 말해 주면 의외로 편해하실 수도 있어요."
몇 주 뒤 그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만나 보니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었고, 자기가 미루던 일을 차근차근 같이 챙겨 줘서 오히려 고마웠다고요. 잘될지 안 될지는 두 사람이 정할 일이지만, 적어도 네 글자 때문에 시작도 못 하는 일은 피한 셈입니다.
MBTI를 안다는 건 "누구를 피해야 하는지" 아는 게 아니라, "누구와도 조금 더 잘 지내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네 글자는 문을 닫는 열쇠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단서입니다.
'나랑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유형의 사람과 의외로 잘 지내게 된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떤 순간에 그 사람을 다르게 보게 됐는지 댓글로 나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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