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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저는 그냥 서류 정리나 잘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협상은 체질이 아닌가 봐요."
해외영업팀에 들어온 지 2년쯤 된 후배가 회식 자리에서 한 말입니다. 그 친구는 ISTJ였습니다. 지난 거래 기록을 누구보다 꼼꼼하게 정리했고, 바이어별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바이어 앞에만 서면 말이 줄었습니다. 오늘은 그 후배 이야기로 MBTI의 '부기능'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주기능만 알던 후배
MBTI에서는 유형마다 가장 먼저, 가장 자연스럽게 쓰는 기능을 주기능이라고 합니다. ISTJ의 주기능은 내향적 감각(Si)입니다. 지난 경험과 사실을 차곡차곡 쌓아 두고, 그 기억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힘입니다. 그 후배가 거래 기록을 완벽하게 정리하던 모습이 바로 Si입니다.
그 친구는 MBTI 결과지를 보며 자신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사람'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협상처럼 바깥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일은 자기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두 번째로 잘 쓰는 기능, 부기능
그런데 사람에게는 주기능만 있는 게 아닙니다. 주기능 다음으로 잘 쓰는 기능이 있는데, 이것을 부기능이라고 합니다. 부기능은 주기능을 돕고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 방향의 균형 주기능이 내향이면 부기능은 외향, 주기능이 외향이면 부기능은 내향입니다. 안으로만, 혹은 밖으로만 치우치지 않게 해 줍니다.
- 역할의 균형 주기능이 정보를 모으는 기능(S, N)이면 부기능은 판단하는 기능(T, F)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기만 하고 결정하지 못하거나, 결정만 하고 살피지 못하는 걸 막아 줍니다.
ISTJ의 부기능은 외향적 사고(Te)입니다. 정보를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바깥으로 밀고 나가는 힘, 기준과 근거를 세워 상대를 설득하는 힘입니다. 그 후배는 이미 이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있다는 걸 몰랐던 겁니다.
기록 위에 논리를 얹었더니
얼마 뒤 그 후배가 오래된 바이어와 단가 협상을 맡게 됐습니다. 저는 "말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네가 정리한 기록으로 근거표를 만들어 가 봐"라고만 했습니다.
그 친구는 지난 3년 동안의 주문량, 납기 준수율, 클레임 건수를 한 장의 표로 정리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주기능 Si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표를 근거로 "그래서 이 단가가 합리적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라고 순서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이건 부기능 Te의 몫이었습니다.
바이어는 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온 건 처음이네요." 협상은 생각보다 쉽게 끝났습니다. 그날 이후 그 후배는 협상 전에 늘 근거표를 만들었고, 회의에서 먼저 의견을 내는 날도 많아졌습니다.
부기능을 알면 달라지는 두 가지
그 후배가 달라진 건 실력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부기능을 아는 것이 두 가지를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역량입니다. 어떤 기능이 내 두 번째 무기인지 알면 의식적으로 꺼내 쓸 수 있고, 쓸수록 더 다듬어집니다. 그 후배도 근거표를 만들어 밀고 나가는 일을 반복하면서 협상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둘째는 자신감입니다. 사실 이게 더 큽니다. 부기능을 모르면 주기능 밖의 일은 전부 '내 체질이 아닌 일'이 됩니다. 하지만 부기능을 알면 "이것도 원래 내가 가진 힘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후배가 처음 근거표를 들고 협상장에 들어갈 때 덜 떨었던 건, 그게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던 힘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기능만 아는 사람은 자기를 한 가지 색으로 보고, 부기능까지 아는 사람은 자기를 두 가지 색으로 봅니다.
내 주기능과 부기능 찾아보기
16가지 유형의 주기능과 부기능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 유형을 찾아 두 번째 칸을 눈여겨보세요.
| 유형 | 주기능 | 부기능 | 부기능을 쓰면 이런 힘이 생깁니다 |
| ISTJ, ISFJ | Si | Te / Fe | 쌓아 둔 경험을 근거로 밀고 나가거나(Te), 사람을 챙기며 조율함(Fe) |
| INTJ, INFJ | Ni | Te / Fe | 머릿속 그림을 실행 계획으로 바꾸거나(Te),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공감을 얻음(Fe) |
| ISTP, INTP | Ti | Se / Ne | 혼자 따진 논리를 현장에서 바로 시험하거나(Se), 새로운 가능성으로 넓힘(Ne) |
| ISFP, INFP | Fi | Se / Ne | 마음속 가치를 행동과 감각으로 표현하거나(Se), 새 아이디어로 풀어냄(Ne) |
| ESTP, ESFP | Se | Ti / Fi | 현장의 경험을 논리로 정리하거나(Ti), 나에게 중요한 가치로 걸러냄(Fi) |
| ENTP, ENFP | Ne | Ti / Fi | 쏟아지는 아이디어를 논리로 다듬거나(Ti), 진짜 하고 싶은 것을 골라냄(Fi) |
| ESTJ, ENTJ | Te | Si / Ni | 밀고 나가기 전에 과거 사례를 점검하거나(Si), 장기적 방향을 내다봄(Ni) |
| ESFJ, ENFJ | Fe | Si / Ni | 사람을 챙기는 방식을 경험으로 다지거나(Si), 사람들의 미래를 그려 봄(Ni) |
부기능을 꺼내 쓰는 연습
그 후배를 보면서 저도 다른 후배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무엇을 제일 잘하고, 그다음으로 뭘 잘해?" 대부분 첫 번째는 바로 답하는데 두 번째에서 머뭇거립니다. 그럴 때 해 볼 만한 연습입니다.
- 칭찬받았던 순간을 떠올리기 주기능이 아닌데 "의외로 잘한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이 부기능일 가능성이 큽니다.
- 주기능의 결과물을 부기능으로 넘겨 보기 정리한 자료로 설득해 보고, 떠오른 아이디어를 하나만 골라 실행해 봅니다. 그 후배의 근거표처럼요.
- 부기능이 성공한 경험을 기록하기 작은 성공이라도 적어 두면 '원래 내 힘'이라는 믿음이 쌓입니다.
지난 글에서 스트레스 때 튀어나오는 열등기능을 이야기했다면, 부기능은 그 반대편에 있는 '이미 준비된 두 번째 무기'입니다. 주기능만으로 버거운 순간에 열등기능이 터지기 전, 부기능을 먼저 꺼낼 수 있다면 훨씬 덜 지칩니다.
부기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새로운 능력을 얻는 일이 아니라, 이미 가진 능력에 이름을 붙여 주는 일입니다. 이름이 생기면 그 힘을 믿고 쓸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의 부기능은 무엇인가요? 주기능이 아닌데 의외로 잘한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이 있다면 댓글로 나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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